헬레니즘 철학은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부터 기원전 31년 악티움 전투까지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 시대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며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320년 경에서 기원후 200년까지의 약 520년 간의 기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대의 주요 지배적인 학교는 스토아파, 에피쿠로스파, 회의파로 나눠지고 있다.
배경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의 이전 고전기는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경-399년경)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당시 이들 학교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었고 윤리와
유다이모니아에 도달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올드 아카데미로 알려진
초기 플라톤주의는 플라톤에서 시작되고, 이어 슈페시푸스가
학교장으로 그의 뒤를 이어(기원전 339년까지), 제노크라테스(기원전 313년까지)로
이어진다. 그들은 모두 수에 관한 피타고라스의 추측을 플라톤의
형태 이론과 융합시키려고 했다.
페리파테틱 학파는 테오프라스토스(기원전 371년-기원전 287년)와
스트라토 오브 람프사카스(기원전 335년-기원전 269년)에서 시작해 사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유지하고 발전시킨 철학자들로 구성됐다.
그들은 사물의 궁극적인 기초를 이해하기 위해 세계 조사를 일제히 말하였다.
인생의 목표는 너무 많은 양극단과 너무 적은 양극단 사이의 평균을 유지하는
것으로 구성된 고결한 행동에서 비롯된 에우다이모니아다.
기원전 300년 헬레니즘의 세계.
헬레니즘 시대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의 죽음에서 시작됐고,
이듬해인 기원전 322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에서 시작됐다.
고전적인 사상가의 대부분은
아테네에 거점을 두고 있었지만, 헬레니즘 시대의 끝에 철학자들은 로마나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했다.
이 변화는 2세기 중반부터 로마의 군사적 승리로 이어졌다.
87년 술라가 아테네를 점령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본이 파괴되어
로마로 보내졌다.
헬레니즘 시대의 끝은 철학적인 것과는 일치하지 않지만, 로마 제국 시대가 되면
서서히 고대 로마 철학의 지배를 지각할 수 있게 된다.
A.C. 그레일링에 따르면 이 시대의 더 큰 불안과 자율성의 상실로 인해
철학을 외부 세계로부터 내면의 안전을 찾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삶을 개선하기 위해 철학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이 흥미는
에피쿠로스의 주장 중 '인간의 고통을 받지 않기 위해 치료를 제공하는 철학자의
말은 '비어 있다'는 것에 포착되었다.
스토아
스토아학파는 기원전 3세기 키티온의 제논에 의해 설립된 학파로
삶의 궁극적 목표는
자연과의 조화라는 키니코스학파의 도덕 사상에 기반을 두었다.
주요점부터 말하자면, 스토이커스는 신체적 즐거움보다는 내면적인
정신적 평화와 행복 즉 내면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스토아파의 제3대 지도자인 크리십스는 논리학에 관한 300권 이상의 책을 썼다.
그의 작품은 사라졌지만, 그의 논리 시스템의 개요는 단편과 증언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 제3대 교장인 크리시푸 스는
스토익 논리로 알려지게 되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의
라이벌로 간주된 연역적 시스템인 스토익 삼단논법을 포함시켰다
스토아학파는 모든 존재가 모든 것은 아니지만 물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기존의 존재 외에 시간, 장소, 공허함, 그리고 할 말을 할 수 있는 4개의
독립된 실재를 인정했고 단순히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러한 지위는 일반인들에게 거부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아리스토테레스와
마찬가지로 물체가 뜨거우면 그것은 보편적인 열 체의 일부가 물체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그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스토아학파 지식은 또 이성의 사용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실은 오류와 구별할 수 있다. 비록 실제로는 근삿값만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스토익에 따르면 감각은 끊임없이 감각을 받는다. 감각을 통해 물체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맥동, 상상력에 인상을 남긴다.
인상을 판단하여 현실의 진정한 표현과 거짓 표현을 구별할 수 있게 한다.
몇몇 인상은 바로 동의할 수 있지만, 다른 인상은 신념 또는 의견이라는
라벨을 붙일 수 있는 다양한 정도의 주저된 승인만을 달성할 수 있다.
이성에 의해서만 우리는 명확한 이해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스토아학파의 현자가 달성할 수 있는
특정의 참된 지식은 동료의 전문 지식과 인류의 집단적 판단에 의해서
확신을 검증하는 것에 의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
기원전 3세기에 에피쿠로스에 의해 설립된 학파로 쾌락주의의 철학을 펼쳤다.
주 요점부터 말하자면, 에피쿠로스는 신체적 감각적인 쾌락이 인간의 가장 큰
즐거움, 그 즐거움만이 삶의 목표를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341년 사모스섬에서 태어난 그는 머리가 뛰어났으며 14세에 헤시오도스의
서적에 혼돈 개념을 스승님들이 설명해주지 못하자 그들을 무시하게 되면서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 18세에 아테네로 들어가 군복무를 했으며 학교 선생님으로
가르치다가 데모 크리스토 책을 보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32세에 람사코스와 학파를 세우며 5년을 지냈고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철학공동체인 '정원'을 세우면서 35년간 제자를 양성하며 가르쳤다.
에피쿠로스학파는 그것을 '정원' 학파라고도 불렸는데 아테네 교외에 정원을 사들여
제자들과 함께 정원을 일구며 우정을 쌓아갔고 귀족 남성만 받는 다른 학교에 비해
에피쿠로스자신과 뜻만 갔다면 여자, 노예, 매춘등 가리지 않고 받았으며 주변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금욕주의에 가까운 쾌락주의를 주장하였고 고통 없이 심신 평화가 오는
아타락시아를 추구하며 모두에게 평등했다.
에피쿠로스는 72세에 14일간 지병을 앓다가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흔히 쾌락주의를 들으면 방탕한 생활을 생각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쾌락주의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의미이다. 에피쿠로스는
고통 없는 행복한 쾌락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소하게 살아가는 일상이나
동물들이 자유로이 숲을 거니는 그런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였으며 소소한
안정과 평안을 찾는 금욕주의에 가까운 쾌락을 주장했다.
#고대철학 # 헬레니즘철학 #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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